쉰들러 리스트 그 의혹 제기하기
01) 쉰들러 리스트의 의문을 제기하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명화 쉰들러 리스트)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광기는 극에 달해 인종청소를 명분으로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을 학살했다.
1944년 그날도 무려 1000여명의 유대인이 포로수용소 내 가스실에서 죽을 운명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 삼엄한 경비를 뚫고 도주로를 열어준 사람이 있었다. 영웅이 된 남자는 오스카 쉰들러였다.
그러나 2004년 역사학자 데이비드 크로 박사가 쉰들러의 선행이 조작됐다고 주장하면서 세기의 영웅은 논란에 휩싸인다.
크로 박사가 문제 삼은 것은 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탈출시키기 위해 작성한 명부로 알려진 이른바 쉰들러 리스트였다.
(그의 저서 오스카 쉰들러에서 의문을 제기한 데이비드 크로우 박사)제2차 세계대전 당시 쉰들러는 수완 있는 실업가로서 도자기의 표면을 매끄럽게 칠하는 에나멜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나치 군인들에게 뒷돈을 대주며 자신의 사업을 키웠지만 문제는 노동력 확보였다.
높은 임금을 주지 않고 노동력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쉰들러는 무차별 학살당한 유대인을 떠올렸다.
그러면서 나치 당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유대인을 알선해 달라고 요청했다.
쉰들러 리스트는 쉰들러가 공장에 숨긴 유대인 리스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라고 일축했지만 증언자가 나왔다.
홀로코스트가 횡행할 당시 나치 대원으로 활동했던 그는 이렇게 말했다.
쉰들러 리스트는 골드만이라는 남자가 쉰들러에게서 돈을 받고 무작위로 유대인의 이름을 적은 것이라고 증언했다.
결정적으로 쉰들러의 명단이 진정 유대인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킨 증거라면 명단을 작성할 당시 쉰들러가 유대인과 함께 탈영소에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쉰들러가 유대인의 탈출을 도왔다는 1944년 5월 그는 나치 사령관 아몬 고스에게 뇌물을 준 혐의로 감옥에 투옥돼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쉰들러를 영웅으로 기억하게 되었을까?
(영화 쉰들러 리스트)크로 박사는 당시 쉰들러가 유대인을 자신의 공장에 취직시킴으로써 나치에 희생되는 생명을 구한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대인을 이용해 개인의 이익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클로 박사는 왜곡된 사실로 쉰들러가 독일 역사에서 신화로 알려지게 된 것은 쉰들러 캐릭터를 영웅으로 설정한 영화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문제가 제기되자 일부 학자는 쉰들러의 삶을 재고한 뒤 역사에 남을 기록은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쉰들러 이야기를 영화화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대변인은 이렇게 주장했다.
사실이 그렇더라도 결과적으로 쉰들러에 의해 수용소에 있던 유대인들이 목숨을 부지한 것은 사실이다.
영화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제작되거나 명백한 증거가 아니라 일부 증언만으로 한 사람의 업적을 판단하기 어렵다고 맞서 논란이 더 벌어졌다.
쉰들러가 사망한 지 25년 만에 그의 유품 하나가 발견되면서 쉰들러 리스트는 다시 큰 관심을 끌게 됐다.
쉰들러의 연인 안네 마리·슈 타이어가 보관하던 여행용 가방 안에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전부터 쉰들러가 사망한 1974년까지 그의 행적을 엿볼 수 있는 문서가 알려지고 있다.
가방 안에는 보험증서, 신문 스크랩, 사진, 쉰들러 공장의 도면 서류, 그리고 문제가 된 바로 그 쉰들러의 리스트가 있었다.
(왼쪽부터 팀쿡, 오프라 윈프리, 스티븐 스필버그가 대화를 즐기고 있다)일목요연하게 정리된 리스트로 알려졌던 것과는 달리 실제 쉰들러 리스트는 수많은 리스트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 공장을 가동한 시기부터 종전 직후인 1945년 5월까지 리스트를 1주일 단위, 1개월 단위로 자른 뒤 일치별로 업데이트한 흔적이 있었다.
심지어 가방 안에는 쉰들러가 나치 당원과 맺은 거래 계약서도 들어 있었다.
이로써 사람들은 쉰들러에 대한 재평가를 해야 한다는 의견과 영웅에 대한 흠집내기라는 의견으로 나뉘었고 그가 진정한 영웅인지 조작된 가짜 영웅인지에 관심이 쏠렸다.
며칠 뒤 쉰들러 리스트의 진실이라며 기자회견을 연 사람이 있었다. 쉰들러의 아내 에밀리였다.
그는 죽기 전에 진실을 밝히기로 했다며 쉰들러 리스트의 실체를 고백했다. 그의 기억은 이랬다.
1944년 봄 쉰들러 공장이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날이었다.
쉰들러가 집을 비운 사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250여 명의 유대인들이 4대의 마차를 몰고 와 구원을 호소했다고 한다.
에밀리는 그들을 그냥 두면 모두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그들을 숨겨두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쉰들러가 이를 보고"자기 공장에서 일을 하면 높은 임금을 들이지 않아도 되는 "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평소 친분이 두터운 나치 당원을 찾아가 뇌물을 제공한 뒤 유대인을 빼냈다고 한다.
쉰들러 리스트 그 의혹 제기하기그때 공장에 들고 나온 유대인 명단은 쉰들러 리스트라고 한다.
그런데 쉰들러는 유대인이 갖고 있던 금제품 시계 신발 의류 등을 모두 팔아치웠고 그 돈으로 유흥을 즐겼다고 한다.
또 밤낮으로 일한 유대인을 돌본 것은 쉰들러가 아니라 나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쉰들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밀리가 남편의 공을 자신에게 돌리기 위해 허위 사실을 알려준다며 반발했다.
하지만 쉰들러의 가방에 들어 있던 서류와 나치 관련 서류 등을 토대로 쉰들러의 행적을 추적한 홀로코스트 연구학자들은 새로운 문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문서에는 자신들이 독일군의 무력 아래 에나멜 공장에 강제 수용됐다는 당시 유대인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쉰들러는 또 독일군이 연합군에 항복할 때 자신의 탈출을 위해 유대인을 무장시켜 싸우게 했다.
이때 남은 유대인은 모두 교수형을 당했다는 내용도 기록돼 있다.
또 전쟁이 끝난 뒤 나치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이유로 쉰들러가 전범재판에 회부되자 공장에 남은 1000여 명의 유대인들이 쉰들러의 공적을 증언하도록 했다.
이 증언을 바탕으로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기록도 있었다.
(뒤틀린 영웅 오스카 신들러)그러자 독일에서는 쉰들러 논란에 대해 부끄러운 과거를 반성하는 기회로 삼겠다고 했지만 홀로코스트 기록을 들고 나오길 원치 않는다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일그러진 영웅 오스카 쉰들러.
그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300만 명이 죽어간 지옥에서 살아남은 1,200명의 사람들
02) 오늘의 명언
시련이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과 꿈은 인생의 설탕이다. 꿈이 없으면 인생은 쓴다"-릿톤
성질은 향기예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좌절 없이 승리한 드높은 기상은 꽃이 되고 가슴에 남아 향기가 되어 이 세상에 날아갑니다.
미래에 사로잡혀 있으면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과거까지 재구성하려 들게 된다.-에릭 호픽
참고 자료<네이버 검색>.<서프라이즈>mbcc&i





